일본 : 모리야마, 조선 : 신헌
일본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은 것 추궁
일본은 조선과 교역을 요구. 조약을 맺어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만국공법의 기본이라 주장
일본은 조약을 맺지 않으면, 거느린 군사 4000여명과 후에 또다시 침공하겠다고 위협
이후 개화파의 형성
고종과 개화파 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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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사를 지배한다.
이러한 세계사적 조류에 후발주자로서 일본이 뛰어들었다. 후발주자였으므로 일본은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기능하기에 아직 경제적인 기반이 취약했다. 따라서 침략적인 경제기지의 건설이 필요했다. 그러한 대상으로서 조선이 가장 적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배
조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의 복잡한 대결구도에 본격적으로 놓이게 되었던 반면, 일종의 상호견제 체제 속에서 능동적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거문도 사건의 의미는 19세기 후반 세계적 차원에서 대결하던 영국과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충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독일 공사관이 폐쇄됨에 따라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비공식 교류는 계속 이어져 1927년 영친왕은 유럽 여행길에 힌덴부르크 원수를 접견한 바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한국 학생들이 유학차 독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서 냉전은 독일과 한국 모두에게 국
세계관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중국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의미했다. 일본의 경우는 탈아입구를 외치며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조선 또한 기존의 조공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한편 중국 내부에서는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탈피뿐만 아니라 청조 내부
세계에서 구체화하는 데에는 기가 필요한데, 기는 사물과 사물 간의 차이 즉 개별성을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개별성은 사회적 분리를 만든다. 부(父)와 자(子), 군(君)과 신(臣), 부(夫)와 부(婦), 장(長)과 유(幼)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논리가 조선시대의 백성들이 자신의 신분을 인
조선정책의 변화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과 청은 각각 군대를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6월 15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의 보고를 통해 군란 소식을 알게 된 일본정부는 조선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하나부사를 전권위원으로 하여 군함
(1) 1930년대 정세
1920년대까지 상대적으로 안정된 발전을 이루어오던 일본 자본주의는 1927년의 금융공황에 이어 1929년 세계대공황, 1930년 농업공황 등을 차례로 직면하면서 초래된 정치, 경제적 위기를 모면하고자 대륙침략전쟁을 도발하였고,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였다. 이 여파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